에드워드 알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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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워드 알몬드는 1892년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군인이다. 버지니아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하여 프랑스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육군 지휘참모대학교, 육군 전쟁 대학교, 해군 전쟁 대학교를 졸업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제92 보병 사단을 지휘했으며,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X 군단을 이끌었다.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장진호 전투에서 부대를 지나치게 분산시켜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51년 육군 전쟁 대학교 사령관으로 재임명되었으며, 1953년 퇴역 후 보험 임원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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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알몬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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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 이름 | Edward Mallory Almond |
별명 | Ned |
출생일 | 1892년 12월 12일 |
사망일 | 1979년 6월 11일 (86세) |
출생지 | 버지니아주 루레이 |
사망지 |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
안장 장소 | 알링턴 국립묘지, 버지니아,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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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복무 | |
소속 | 미국 육군 |
복무 기간 | 1916년 – 1953년 |
군번 | 0-4666 |
최종 계급 | [[File:US-O9 insignia.svg|25px]] 육군 중장 |
병과 | [[File:USA - Army Infantry Insignia.png|25px]] 보병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
주요 지휘 | 12th Machine Gun Battalion 3rd Battalion, 45th Infantry Regiment 92nd Infantry Division 2nd Infantry Division X Corps United States Army War College |
훈장 | Distinguished Service Cross (2) Army Distinguished Service Medal (2) Silver Star (2) Purple Heart Eulji Order of Military Merit (2) |
2. 생애
에드워드 알몬드는 1892년 버지니아주 루레이에서 태어나, 1915년 버지니아군사학교(Virginia Military Institute)를 졸업했다. 1916년 육군 보병 장교가 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 달에 미국 육군 제4보병사단 소속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였다. 1930년 미군 캔자스주 포트 리벤워드에 있는 지휘관 간부 학교를 졸업했고, 필리핀 복무를 마친 후 1934년 미국 육군 전쟁 대학을 졸업했다.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미군 참모본부 정보부에서 일했으며, 1938년 10월에 소장으로 진급, 1940년 미국 해군 전쟁 대학을 졸업했다.
한국 전쟁에서 10군단장으로 인천 상륙 작전과 원산 상륙 작전을 지휘하였으며, 흥남 철수에서 작전 계획에 없던 민간인 수송을 명령하여 피난민 10만 명을 거제도로 탈출시켰다.[5]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에드워드 맬러리 알몬드는 1892년 12월 12일 버지니아주 루레이에서 태어났다. 농기구 판매원인 아버지 월터와 어머니 그레이스 포팜 알몬드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었다. 1895년에는 남동생 맬컴이, 1897년에는 여동생 주디가 태어났다. 가족들은 어린 알몬드를 "네드"라고 불렀다. 그는 할머니로부터 미국 남북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알몬드의 외할아버지 토마스 포팜과 증조부 윌리엄 바튼 맬러리는 남부 연합군에서 복무했다. 알몬드가 젊었을 때, 버지니아에는 남북 전쟁 참전 용사들이 많았지만, 훗날 알몬드는 할아버지나 전쟁에 참여했던 어른들이 그 갈등에 대해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다만, 그는 전쟁에서 졌다는 것에 대한 씁쓸함은 느낄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마이클 E. 린치는 알몬드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몬드는 항상 군대에 관심이 많았고, 직업 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평생 스톤월 잭슨의 "결심하는 대로 될 수 있다"는 말에 영감을 받은 그는 1915년 6월 버지니아 군사 학교(VMI)를 졸업했다. 그는 65명의 생도 중 3등으로 졸업했다. 1916년 11월 30일 미국 육군 소위로 임관되었으며,[1], 1917년 4월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5년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 달에 미국 육군 제4보병사단 소속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였다.[1] 뫼즈-아르곤 공세에 제4 사단 제12 기관총 대대장으로 참전했으며, 당시 사단장은 조지 H. 캐머런 소장이었다. 프랑스 복무 중 전투에서 부상을 입어 실버 스타 인용(나중에 실버 스타 훈장으로 승격)을 받았다.[1]1918년 8월 초에 입은 부상에 대해 알몬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뫼즈-아르곤 전투에서 해방된 후, 알몬드의 제4 사단은 10월 중순 새로 창설된 제2 군으로 전출되었다. 알몬드는 10월 1일에 지휘권을 맡은 자신의 대대를 11월 12일로 예정된 새로운 공세를 위해 준비시켰지만, 독일과의 휴전으로 이 계획은 중단되었다. 뫼즈-아르곤에서의 비교적 짧은 작전은 제4 사단에 큰 피해를 입혀 45명의 장교가 사망하고 199명이 부상당했으며, 1,120명의 사병이 사망하고 6,024명이 부상당했다. 알몬드의 대대는 19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4명이 장교였다. 그 후 몇 달 동안 알몬드와 그의 대대는 독일에서 점령 임무를 수행했다.
2. 3. 전간기
에드워드 알몬드는 1915년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육군 보병 장교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마지막 달에 미국 육군 제4보병사단 소속으로 프랑스에서 복무하였다.[1] 1930년 캔자스주 포트 리벤워드에 있는 지휘관 간부 학교를 졸업했고, 필리핀 복무를 마친 후 1934년 미국 육군 전쟁 대학을 졸업했다. 1934년부터 1938년까지 미군 참모본부 정보부에서 일했으며, 1938년 10월에 소장으로 진급, 1940년 미국 해군 전쟁 대학을 졸업했다.1919년부터 1924년까지 매리언 군사 학교에서 군사 과학을 가르쳤다.[1] 이후 조지아주 포트 베닝에 있는 미국 육군 보병 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928년까지 매리언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다. 포트 베닝의 보병 학교에서 교관으로도 활동하며 학교 부사령관이었던 조지 C. 마셜 미국 육군 중령과 친분을 쌓았다.
1930년 앨몬드는 캔자스주 포트 리븐워스에 있는 미국 육군 지휘참모대학교를 졸업했다. 필리핀에서 필리핀 정찰병 대대 지휘 임무를 수행한 후, 1934년 미국 육군 전쟁 대학교에 입학, 졸업 후 4년 동안 참모부 정보부에 배치되었다. 1938년 9월 1일 중령으로 진급,[2] 육군 전쟁 대학교, 항공대 전술 학교를 거쳐 1940년 해군 전쟁 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로드 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에 있는 제6군단 사령부에서 참모 임무를 맡았고, 1941년 10월 14일 임시 대령으로 진급했다.[2]
2. 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1년 12월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직후, 알몬드는 1942년 3월 15일 준장으로 진급했으며,[2][1] 당시 애리조나에 주둔해 있던 찰스 P. 홀(Charles P. Hall) 소장이 지휘하는 신설 아프리카계 미국인 부대인 제93 보병 사단의 사단 부사령관 (ADC)으로 임명되었다.
알몬드는 한때 VMI 동문이자 당시 미국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조지 C. 마셜(George C. Marshall)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평가는 알몬드가 그의 동료들보다 먼저 9월 23일에 소장으로 진급하고,[2][1] 거의 전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 보병 사단을 지휘하게 된 데 부분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1942년 10월 사단 창설부터 1945년 8월까지 이 직책을 맡았다.
그는 미국에서 훈련을 받던 중과 1944–1945년 이탈리아 전역의 마지막 단계에서 전투를 치르는 동안 사단을 이끌었다. 1944년 후반기에 걸쳐 분산적으로 이탈리아에 도착한 사단은 조직에 여러 변화를 겪었고, 종종 치열했던 이탈리아 전투에서 총 3,0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으며, 이는 마크 W. 클라크(Mark W. Clark) 중장과 나중에는 루시안 트러스콧(Lucian Truscott) 휘하의 미국 육군 제5군의 일부를 구성했다.
마셜은 알몬드가 이 어려운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알몬드를 이 임무에 임명했지만, 사단은 전투에서 부진한 성과를 보였다. 알몬드는 사단의 저조한 성과를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병사들에게 돌렸는데, 이는 흑인이 형편없는 군인이라는 인종 차별적인 군대 내의 만연한 편견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3]—그리고 다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전투 병력으로 사용하지 말 것을 육군에 권고했다. 알몬드는 측근들에게 사단의 저조한 전투 기록이 그에게 더 높은 지휘권을 얻지 못하게 했다고 말했다.
2. 5. 일본 점령군 근무
1946년, 알몬드는 도쿄에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부의 인사 책임자로 전출되었다. 이 직책은 일반적인 정체된 직책이었지만, 알몬드는 일본 주둔군의 인적 자원을 배치하는 상당한 과제를 매우 효과적으로 처리하여 맥아더의 참모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인물로서 맥아더의 신임을 얻은[3] 알몬드는 당시 재임 중이던 폴 J. 뮬러가 본국으로 귀환하게 되자 1949년 1월 참모총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1947년 1월 미국 극동군이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과 알몬드 등 일부 참모진을 GHQ와 겸임하는 형태로 편성되었다. 1949년 2월, 알몬드는 미국 극동군 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2. 6. 한국 전쟁 참전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참모장을 겸임했다. 인천 상륙 작전 당시 제10군단장이었다. 1951년 중장으로 진급했다.[6]더글러스 맥아더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알몬드는 인천 상륙 작전과 원산 상륙 작전을 지휘했다. 흥남 철수에서는 작전 계획에 없던 민간인 수송을 명령하여 10만 명의 피난민을 거제도로 탈출시키는 데 기여했다.[5]
알몬드는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워커와의 불행한 경쟁은 한국에서 일어난 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매슈 리지웨이 중장은 워커의 사망으로 제8군 사령관이 된 후에도 알몬드를 X 군단 사령관으로 유임시켰다. 리지웨이는 알몬드의 적극적인 태도를 존경했지만, 그의 대담함이 지휘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면밀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후 알몬드와 X 군단은 1951년 2월과 3월에 있었던 중국군의 공세 격퇴 작전과 제8군의 반격 작전인 킬러 작전에 참여했다.[3]
훗날 장군이자 국무장관이 된 알렉산더 헤이그는 한국 전쟁에서 알몬드의 부관으로 복무했다.[7]
2. 6. 1.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6월 조선인민군의 기습 공격 이후, 유엔군은 철수를 강요받았고 결국 부산 교두보까지 후퇴했다.더글러스 맥아더는 11월에 인천 상륙 작전을 통해 반격을 결정했다.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으로 구성된 상륙 부대는 원래 "X 부대"로 명명되었으며 알몬드의 지휘를 받았다. X 부대라는 명칭이 병참 장교들에게 혼란을 주자, 알몬드의 제안에 따라 이 부대는 X 군단으로 재지정되었다. 맥아더는 X 군단을 제8군에서 분리한 후, 상륙 작전 경험이 없는 알몬드를 상륙 직전에 주요 상륙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5]
알몬드는 인천 상륙 초기 단계에서 해병대 상륙에 사용된 수륙양용 장갑차가 물에 뜰 수 있는지 질문하여 미국 해병대 장교들의 비웃음을 샀다.[5] 상륙 작전은 성공했지만, 알몬드는 효과적인 추격을 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패주한 조선인민군은 북쪽으로 탈출했다.
이 기간 동안,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X 군단의 일부였던 제1해병사단 사령관 O. P. 스미스 소장[5]은 알몬드와 많은 갈등을 겪었다.
2. 6. 2. 원산 상륙 작전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 맥아더는 1950년 11월, 조선인민군을 추격하기 위해 원산 상륙 작전을 계획했다. 상륙 부대는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으로 구성되었고, 처음에는 "X 부대"로 명명되었다가 알몬드의 제안으로 X 군단으로 재지정되었다. 맥아더는 X 군단을 제8군에서 분리하고, 상륙 작전 경험이 부족한 알몬드를 상륙 직전 지휘관으로 임명했다.[5]알몬드는 인천 상륙 작전 초기 단계에서 해병대가 사용하는 수륙양용 장갑차가 물에 뜰 수 있는지 질문하여 해병대 장교들의 비웃음을 샀다.[5] 상륙은 성공했지만, 알몬드는 효과적인 추격을 하지 못해 대부분 패주한 조선인민군은 북쪽으로 탈출했다.
이 기간 동안, X 군단의 일부였던 제1해병사단 사령관 O. P. 스미스 소장[5]은 알몬드와 많은 갈등을 겪었다.
2. 6. 3. 장진호 전투
1950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알몬드는 X 군단을 북한 북동부 지역으로 진격시키면서 부대를 광범위하게 분산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분산은 태스크 포스 페이스의 파괴를 포함하여 중국 인민지원군에 의한 X 군단의 패배와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대가 간신히 탈출하는 데 기여했다.[3] 알몬드는 X 군단에 대한 중국군의 공격 규모를 인지하는 데 늦었고, 엄청난 규모의 중국군이 포진해 있음에도 육군과 해병대 부대에게 전진을 촉구했다. 그는 평소처럼 무모한 대담함을 보이며 중국군의 강점과 기술을 과소평가했으며, 한때 부하 장교들에게 "지금 여러분을 지연시키는 적은 북쪽으로 도망치는 중국 사단의 잔당에 불과하다. 우리는 계속 공격할 것이고, 압록강까지 갈 것이다. 중국의 세탁소 직원들에게 막히지 마라."라고 말하기도 했다.[3] 그의 측근은 "적극적일 때가 되면, 네드는 적극적이었다. 신중해야 할 때가 되면, 네드는 적극적이었다."라고 말했다.[3]2. 6. 4. 흥남 철수
한국 전쟁에서 알몬드는 10군단장으로 인천 상륙 작전과 원산 상륙 작전을 지휘하였으며, 흥남 철수에서 작전 계획에 없던 민간인 수송을 명령하여 피난민 10만 명을 거제도로 탈출시켰다.[5]
역사학자들은 1950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X 군단이 북한 북동부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부대를 광범위하게 분산시킨 것에 대해 알몬드를 비판했다. 이러한 분산은 태스크 포스 페이스의 파괴를 포함하여 중국 인민지원군에 의한 X 군단의 패배와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대의 탈출에 기여했다.[3] 알몬드는 X 군단에 대한 중국군의 공격 규모를 인지하는 데 늦었고, 엄청난 규모의 중국군이 포진해 있음에도 육군과 해병대 부대에게 전진을 촉구했다. 그는 평소처럼 무모한 대담함을 보이며 중국군의 강점과 기술을 과소평가했으며, 한때 부하 장교들에게 "지금 여러분을 지연시키는 적은 북쪽으로 도망치는 중국 사단의 잔당에 불과하다. 우리는 계속 공격할 것이고, 압록강까지 갈 것이다. 중국의 세탁소 직원들에게 막히지 마라."라고 말하기도 했다.[3]
2. 7. 한국 전쟁 이후
1951년 7월, 알몬드는 미국 육군 전쟁 대학교의 사령관으로 재임명되었다.[8] 1953년 1월 31일 육군에서 퇴역하여 1979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보험 임원으로 일했다. 1961년부터 1968년까지 버지니아 육군 전문학교 학장을 역임했다.그는 프랑스에서 1945년 3월 19일 전사한 그의 아들인 제157보병연대 대위 에드워드 말로리 알몬드 주니어 근처,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9]
3. 논란
더글러스 맥아더를 숭배하여 어떤 명령이라도 기꺼이 실행했으며, 맥아더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한국 전쟁 종결 후에는 아몬드를 사령관으로 하는 주둔군을 조선에 배치할 생각이었다고 한다.[11] 책임감이 강하고 부하에게도 헌신적인 충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그의 강압성과 급한 성격 때문에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항상 강경한(ever sanguine) 아몬드 장군"이라고 불렸다.[11]
그러나 한국 전쟁에서 그의 강경한 자세는 철수를 거의 인정하지 않아, 겪지 않아도 될 손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에 무능하고 평판이 좋지 않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매슈 리지웨이는 정치적 판단으로 그를 교체하지 않고 끝까지 기용했다.
3. 1. 인종 차별 논란
에드워드 알몬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제92 보병 사단을 지휘하면서 인종 차별적인 언행으로 논란이 된 인물이다. 알몬드는 흑인 병사들의 전투 능력이 부족하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편견은 당시 미국 사회와 군대 내에 만연해 있었다.[3]알몬드는 제92 보병 사단의 저조한 전투 성과를 흑인 병사들의 탓으로 돌렸고, 다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전투 병력으로 사용하지 말 것을 육군에 권고했다. 그는 측근들에게 사단의 저조한 전투 기록 때문에 자신의 승진이 좌절되었다고 말했다.
알몬드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통해 흑인에 대한 자신의 편견을 드러냈다.[4]
> 백인은 전투에서 이탈했다는 비난을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흑인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남부 출신이 흑인을 싫어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역량을 이해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과 식탁에 함께 앉고 싶지 않습니다.
3. 2. 장진호 전투 책임론
역사학자들은 1950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X 군단이 북한 북동부 지역으로 진격하면서 부대를 광범위하게 분산시킨 것에 대해 알몬드를 비판했다. 이러한 분산은 장진호 전투에서 미국 해병대가 간신히 탈출하고, 태스크 포스 페이스가 파괴되는 등 중국 인민지원군에 의한 X 군단의 패배에 기여했다.[3] 알몬드는 X 군단에 대한 중국군의 공격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 늦었고, 엄청난 규모의 중국군이 포진해 있음에도 육군과 해병대 부대에게 전진을 촉구했다. 그는 평소처럼 무모한 대담함을 보이며 중국군의 강점과 기술을 과소평가했으며, 한때 부하 장교들에게 "지금 여러분을 지연시키는 적은 북쪽으로 도망치는 중국 사단의 잔당에 불과하다. 우리는 계속 공격할 것이고, 압록강까지 갈 것이다. 중국의 세탁소 직원들에게 막히지 마라."라고 말하기도 했다.[3] 측근의 말에 따르면 "적극적일 때가 되면, 네드는 적극적이었다. 신중해야 할 때가 되면, 네드는 적극적이었다."라고 한다.[3]알몬드는 조선인민군이 패주했을 때, 효과적인 추격을 하지 못했다. 또한,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X 군단의 일부였던 제1해병사단 사령관 O. P. 스미스 소장[5]은 알몬드와 많은 갈등을 겪었다.
이러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3] 1950년 12월 월튼 워커의 사망으로 제8군 사령관이 된 매슈 리지웨이 중장은 알몬드를 X 군단 사령관으로 유임시켰다.[3]
더글러스 맥아더를 숭배하여 어떤 명령이라도 기꺼이 실행했으며, 맥아더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한국 전쟁 종결 후에는 아몬드를 사령관으로 하는 주둔군을 조선에 배치할 생각이었다고 한다[11]。 책임감이 강하고 부하에게도 헌신적인 충성을 요구했기 때문에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그의 강압성과 급한 성격 때문에 누구에게나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항상 강경한(ever sanguine) 아몬드 장군"이라고 불렸다[11]。 그러나, 한국 전쟁에서 그의 강경한 자세 때문에 철수를 거의 인정하지 않아, 겪지 않아도 될 손해를 입고 있었던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기 때문에 무능하고 매우 평판이 좋지 않은 남자였다. 하지만 리지웨이는 정치적 판단으로 그를 교체하지 않고 끝까지 기용했다.
4. 평가
더글러스 맥아더를 숭배하여 그의 명령이라면 기꺼이 실행하였다. 맥아더는 아몬드를 두텁게 신임하여, 한국 전쟁 종결 후에는 그를 사령관으로 하는 주둔군을 조선에 배치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11]
아몬드는 책임감이 강하고 부하에게도 헌신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그의 강압적이고 급한 성격이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항상 강경한(ever sanguine) 아몬드 장군"이라는 평을 받았다.[11] 그러나 한국 전쟁에서 그는 강경한 자세로 철수를 거의 인정하지 않아 불필요한 손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판이 따랐지만, 리지웨이는 정치적인 판단으로 그를 교체하지 않고 끝까지 기용하였다.
5. 훈장
훈장 | 수여 국가 | 수여 일자 |
---|---|---|
수훈십자장 | 미국 | 1950년 10월 23일, 1951년 5월 28일 |
수훈 훈장 | 미국 | 1945년, 1951년 8월 9일 |
은성 훈장 | 미국 | 1945년 7월 10일 |
공로 훈장 | 미국 | |
수훈 비행 십자장 | 미국 | |
동성 훈장 | 미국 | |
항공 훈장 | 미국 | |
육군 표창 훈장 | 미국 | |
퍼플 하트 훈장 | 미국 | |
멕시코 국경 근무 훈장 | 미국 | |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훈장 | 미국 | |
독일 점령군 훈장 | 미국 | |
미국 방위 훈장 | 미국 | |
미국 종군 훈장 | 미국 | |
유럽-아프리카-중동 전역 훈장 | 미국 | |
제2차 세계 대전 승전 훈장 | 미국 | |
점령군 훈장 | 미국 | |
국가 방위 훈장 | 미국 | |
한국 종군 훈장 | 미국 | |
압돈 칼데론 훈장 1등급 | 에콰도르 | |
솔로몬 훈장 | 에티오피아 | |
바스 훈장 명예 사령관 | 영국 | |
레지옹 도뇌르 사령관 | 프랑스 | |
무공 십자 훈장 1939–1945 팜 | 프랑스 | |
군공 훈장 | 브라질 | |
천수 국가안보 훈장 | 대한민국 | |
대통령 부대 표창 | 대한민국 | |
유엔 한국 훈장 | UN |
6. 대중 문화에서
- ''군단'' 시리즈에서 알몬드 장군은 마지막 두 권인 ''포화 속에서''와 ''후퇴 지옥!''에서 언급된다. 작가(한국 전쟁에서 알몬드 휘하에서 복무)는 알몬드를 긍정적으로 묘사한다.[1]
- 제임스 맥브라이드의 2002년 소설 ''성 안나의 기적''에서, 제92보병사단의 사령관인 올먼 장군은 알몬드를 모델로 했다.[1]
- 2008년 스파이크 리 영화 ''성 안나의 기적''에서 알몬드는 로버트 존 버크가 연기했다.[1]
- 빅터 H. 크룰락의 1984년 소설 ''최초의 전투''에서 알몬드는, 알몬드의 상대였던 셰퍼드 중장과 함께 복무했던 해병대 예비역 중장 겸 작가인 빅터 H. 크룰락에 의해 비판받는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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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朝鮮戦争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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